<원문링크: http://www.seedbed.com/what-can-boxing-teach-us-about-work/>
이 글은 5회 연재글입니다.
매주 1개의 글이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1909년, 미국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복싱 경기가 있었습니다. 미들급 챔피온이었던 Stanley Ketchel 과 떠오르는 미국계 흑인 (African-American) 복서, Jack Johnson과의 경기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Johnson과 시합을 하길 원하는 백인 복서들은 드물었습니다. Johnson은 그 당시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흑인이었습니다. 성급한 성격으로 빠른 차를 몰고,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백인여인들과 연애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백인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이 흑인 복서의 질주를 막아줄 백인 영웅의 탄생을 바라는 염원이 어울려져 엄청난 대진료가 걸린 시합으로 발전하였고, Johnson은 이 도전을 받아주는 백인 복서가 나올 것을 기대하며 잦은 도발을 했습니다.
이 도전을 받아 준 복서가 바로 Ketchel이었습니다. “The Michigan Assassin” (미시간의 암살자)로 불린 Ketchel은 복싱 테크닉에는 손색이 없었지만, Johnson에 비하면 체중의 차이가 엄청났기 때문에 별 승산 없는 경기로 평가 되었습니다. 두 복서는 모두 Ketchel이 Johnson을 이길 확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두 복서는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습니다. 함께 도박과 술 마시는 것을 즐겨했고, 심지어는 사창가도 함께 드나들 정도였습니다. 둘은 이 시합에 걸린 돈을 벌기 위해 시합에 임하기로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계약상의 시합은 20 라운드를 마치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더 많은 라운드가 지나면, 경기가 더 흥미진진해 질 뿐 아니라 두 복서의 주머니도 더 두둑해지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두 복서는 서로 암묵적인 합의를 했습니다. Ketchel이 경기를 이기지 않는 조건하에 Johnson 이 Ketchel을 녹다운 시키지 않고 최대한 오랫동안 경기에 임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두 사람은 링 위에서 서로 펀치를 주고 받으며, 최대한 오랫동안 경기에 임하는 각본을 짜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경기 당일에는 예상대로 야외 경기장은 입추의 여지 없이 가득 메워졌습니다. 두 복서는 서로의 약속대로 잽과 펀치를 날리며 링 위에서 아름다운 춤을 추었습니다. 펀치가 오가며, 서로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면서 두 사람은 각본에 부합하는 시합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2라운드를 접어든 시점에 두 사람의 합의를 깨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상대의 헛점을 발견한 Ketchel은 각본에 벗어나는 펀치를 날린 것이었습니다. Ketchel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Johnson의 얼굴 향하여 정타를 날렸고, Johnson 의 거구는 매트에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장내의 백인들의 환호로 시합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하였습니다. 무적의 Johnson이 다운 당하였고, 스포츠계는 백인의 영웅을 탄생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Johnson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일어났을 뿐 아니라, 더이상 각본대로 싸우지 않겠다는 의지도 함께 깨어났습니다. Ketchel이 각본에 벗어난 행동을 했기 때문에 Johnson 도 각본대로 싸울 명분이 없어졌습니다. 본격적으로 싸움에 임하는 복서에게 경기시간은 몇초 안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Johnson은 Ketchel을 향하여 두번의 강력한 펀치를 날렸고, Ketchel은 두번의 펀치를 맞고 매트위에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후일담에 의하면, Johnson 이 상대의 얼굴을 너무 강하게 가격한 나머지 Ketchel의 이빨자국이 Johnson의 글러브에 새겨질 정도라 했습니다. 경기에 승리한 Johnson은 링 밖으로 나오면서, 관중들을 바라본 후, 매트 위에 누워있던 상대방을 응시하고 경기장을 빠져 나왔습니다.
Jack Johnson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목: Unforgivable Blackness (용성받지 못할 흑인)에서 나리에터는 이 장면을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이 에피소드의 교훈은 … 각본에 따라 살라는 것” 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모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교훈은 복싱과 각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Ketchel과 Johnson, 두명의 선수는 각자,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이상과 배치되는 인생 목표를 쫓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절한 인생의 교훈을 일깨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엘리야가 두 마음 (identity)을 품은 백성과 이를 조정하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꾸짖는 장면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왕상 18:21 개역개정)
영문개역개정 (New Revised Stander Version)에 의하면 21절의 ‘머뭇머뭇’을 ‘절름발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 마음사이에서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한다는 표현으로 나타냅니다.
이는, 엘리야가 자신의 정체성(신앙)과 세계관이 함께 공존할 수 없고, 오직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두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기 위한 표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두 마음을 품고 Ketchel의 실수를 지적하는 엘리야의 예언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 연재되는 글에는 우리의 신앙관과 직업관을 바라보는 다섯 가지 관점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그중 네 가지는 두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Ketchel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정, 육, 그리고 영혼의 해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관점들입니다. 저는 다음의 글을 통하여 다섯개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서, 우리의 신앙관과 직업관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일터의 예배’라고 명명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