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Kevin Kinghorn

<원문링크: http://www.seedbed.com/2-ways-the-church-unintentionally-hinders-lay-ministry/>

목회에 지친 많은 목회자와 교회 리더들을 만나면, “교회에 시급한 일은 더 평신도들이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입니다”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합니다. 하지만 평신도들이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데 교회 자신이 걸림돌이 되는 경우는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저는 교회가 (혹여 무의식적으로라도) 평신도의 사역을 방해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지난 몇년간 내가 눈여겨 본 몇 가지 일들을 여러분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교회 예배안에서 믿음의 식구들을 파송하는 예식을 자주 경험합니다. 파송받는 이들을 강단앞에 세우고 많은 이들이 손을 얹고 함께 기도하고, 안수하며 이들을 사역을 후원하며 파송하는 예식을 누구나 한번쯤은 목격해 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파송의식은 주로 목회로 부름 받은 목회자들이나 선교의 소명을 가지고 타국으로 떠나는 이들을 위해 자주 거행됩니다. 때로는 단기선교를 떠나는 선교팀에게, 그리고 교회에서 진행되는 어린이 성경학교 교사들을 위해 파송예식을 진행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주로 교회에서 후원하는 사역 중심으로 파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파송예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좋은 일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정식으로 후원하지 않는 사역에 헌신하는 이들을 위해 파송예식을 거행하는 교회를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혹시 우리의 잠재의식 안에는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진행되는 공식 사역이 아닌 일들에는 그리스도의 일이 아닌 사역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요? 교회에서 진행되는 사역이 아니기에 그 분야에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이들을 위한 파송예식 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요?

이런 교회를 방문한 경험이 있기는 합니다. 이 교회에서는 직업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학기 초에 인사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이들이 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며, 이들이 학기중에 만나 지도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선한영향력을 끼치게 하기 위해 중보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예배가 인상 깊었을 뿐 아니라, 교회가 바람직한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월요일 부터 금요일까지 세상속의 선교사들로 파송받은 많은 평신도를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사역을 이해하는 부분에 있어 교회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세상속에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평신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의료계에 종사하는 신앙인을 바라볼때 우리는 이를 ‘의료업을 하는 이’로 보는 관점을, ‘주의 부르심을 받고 치유 사역에 동참하는 이’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신앙에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곳에서 사역을 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관점으로 그분들을 대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닌가요?

예를 들면, 제가 만약 의료계에서 일을 하는데, 교회에서는 저의 사역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 할 뿐 아니라, 다른 전문 사역자들과 달리 파송의 개념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제게 주어진 일을 주님의 사역으로 인정하고 섬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은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주님이 주신 은사들 – 섬기는 사역, 행정, 베품과 다른 은사들 –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실제로 자신의 은사를 월요일- 금요일까지의 일터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저에게는 세일즈를 하는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상대하는 기업들이 더 좋은 제품을 구매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사업영역을 새롭게 생각하도록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 친구들은 기업인들이 그에게 어려움을 토로할때 많은 시간을 들여 그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여 주고, 심지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도 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신앙을 가진 저의 친구는 자신의 일터를 ‘격려하는 사역’이라고 정의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제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는 분들은 그 친구가 하는 일이 단순한 직업이 아닌 사역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자신의 일터를 주님이 주신 사역이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격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 내의 사역만을 인정하고 파송하는 교회의 행위를 통하여 평신도들에게 자신의 일터 사역의 소중함을 잃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평신도 사역을 가로막는 두번째 이유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열정적으로 섬기고 신안생활을 하는 젊은이를 보면 슬며시 목회의 길을 권유하는 풍토가 있습니다. 저는 자신의 삶속에 주어진 소명을 찾기를 열망하는 젊은이들과 대화할 기회가 상당히 많은데, 이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들 한번쯤은 목회의 길을 걸으면 좋겠다는 권면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목회의 부름을 받은 젊은이들을 돕고 그들을 권면하는 일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젊고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거의 반사적으로 목회의 길을 권유하는 풍토가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들 만이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분들이고, 전면적으로 주의 사역의 동참하는 이들이라는 생각이 뒷받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열정적인 젊은이들을 보면 목회의 길을 권면하는 것이 아닌가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전의 글을 통하여 우리가 ‘목회자는 전적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에서 ‘목회자만이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진짜 사역자’ 착각하는 현상에 대해 짚어 보았습니다. 저는 후자의 생각을 심어주는 교회나 교우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정적인 젊은이를 볼때마다 목회의 길을 권유하는 우리의 행동들이 목회자의 사역과 평신도의 사역을 구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생각이 근간이 되어 자기가 주어진 일터 사역을 주님이 부여한 사역이라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생각이 아닌가 되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세상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신앙인이라면, 우리가 월요일 부터 금요일까지 섬기는 사무실, 대기실, 교실과 많은 공간들이 우리의 선교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열정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터 선교사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이들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못할 망정, 막지는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태도들이 바뀌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Seedbed.com 애즈베리신학교에서 후원하는 목회자료연구소다. 이곳에서는 웨슬리 신학을 재조명하며 감리교 계통 교회들에게 새로운 사역의 도전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Dari-builders.com은 Seedbed와 한국어 자료 번역 협약을 체결하여 기사 번역중이다.

 

이 주제와 연관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