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Allan R. Bevere

<원문링크: http://www.ministrymatters.com/all/entry/6192/on-the-duty-of-constant-communion-because-some-things-are-too-important-to-neglect>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는 자신의 동생 (찰스 웨슬리)과 함께 일주일에 여러차례 성찬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초기 감리교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성찬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습니다. 웨슬리의 설교 121 “성찬을 규칙적으로 시행해야 할 의무,” 에 의하면(참고: 기독교타임즈에 기재된 ‘웨슬리의 성만찬’, 웨슬리는 왜 성찬에 자주 참여해야 하며, 너무 잦은 성찬에 대해 반발하는 이들에 대한 반론을 제기합니다. 저자도 교회안에서 자라나면서 자주 듣는 교인들의 성토에 대해 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빈번한 성찬에 대한 세번째 반발은, 너무 잦은 성찬이 성찬에 대한 경외심을 떨어뜨린다는 주장입니다. 만일 그렇다 가정해 봅시다. 그로 인해 성찬을 자주 받는 것을 멈춘다는 뜻입니까? 이는 성찬을 지켜 행하라 (Do this)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무 자주 행하면, 성찬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릴까봐 합니다.” 만일 그렇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언제 당신에게 너무 말을 자주 순종하면 경외심이 사라지니까 순종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와 같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따로 빈번한 성찬에 대해서 주님의 명령을 바꾸지 않는 한, 성찬 참예를 거부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찬을 너무 자주 시행하다 보면 성찬의 경외심이 떨어진다는 논리에 웨슬리 목사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성찬을 자주 시행하면서 경외심이 떨어지는 이유가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만큼 중요한 사항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라는 논리입니다.  웨슬리 목사는 이와 같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갑니다.

 

성찬이 주는 경외심은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번도 사용되지 않은 성결함에 우리 자신을 마주하면서 받는 경외심과  믿음으로 주님의 사랑과 경외함 앞에 마주서는 모습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신앙에 근거한 경외심이라기 보다는 자연적인 경외심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경외심으로 참여하는 성찬은 자주 행하여 지다 보면 경외심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참여하는 성찬은 경외심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할 뿐 아니라 커지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웨슬리 당시 교인들에게는 정기적인 성찬으로 인해 ‘성찬의 새로움’ 이 퇴색된다는 생각을 갖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빈번한 성찬로 웨슬리에게 반발했던 이들의 염려는 성찬의 의미 퇴색을 염려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한번도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감정이 퇴색되어지는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 논리의 관점에 비추어 볼때 한달에 한번, 분기에 한번씩 거행되는 성찬도 정기적인 예식이 되고, 따라서 새로움이 없어지는 성찬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이는 성찬으로 우리가 얻는 영적인 유익을 간과한 논리입니다. 주님의 식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느냐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며 따라 행하는 성례 본연의 의미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찬을 자주 집례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성찬이 우리의 영적이 습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달에 한번씩만 기도를 해. 왜냐하면 하나님과 더 자주 이야기를 나누면, 그 의미가 퇴색되거든…” 이라 말하는 신앙인을 본 적 있으신가요?
제자의 삶이란, 매일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며, 이를 위한 영적훈련이 수반되어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를 성화로 이끄는 영적훈련에 매일 드려지는 기도와 최대한 많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보, 난 아무래도 한달에 한번씩만 당신한테 ‘사랑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아. 매일 ‘사랑해’라고 말을 하면, 그 표현이 식상해지고 의미가 퇴색될 것 같거든…” 그와 반대로 제가 만약 매일 아내에게 매일 사랑을 표현한다 가정하겠습니다. 이는 제가 더이상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까봐 걱정하는 아내를 달래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에게 저의 사랑의 표현을 정기적으로 해주며 사랑의 섬김을 통해서, 가족을 향한 사랑이 저의 삶의 습관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몇년전 윌리엄 윌리몬 (William Willimon) 감독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제가 속해있는 자유교회 (Free Church)전통에는 츠빙글리의 분기별 성찬 전통이 엄수되었습니다. 취리히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자인 츠빙글리에게는  3개월에 한번씩 시행되는 성찬이 너무 의식화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적당하다 여겼습니다. 이는 성경과는 상반되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왜 상반되냐면,지난 500년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츠빙글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찬을 적게 드리는 교회일 수록 성찬의 영적인 영향력을 중요시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에서는 성찬을 매주일 엄수하는 것이 규례였기에 상반됐다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존 칼빈이나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 역시 매주 성찬을 권면했기 때문에 상반됐다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식탁에 모여 주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은 제자로서우리를 성화의 길로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의 도구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변화 될뿐 아니라, 교회가 변화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화로 이르는 은총의 수단으로 성만찬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존 웨슬리는 마지막 유언에도 이와 같이 성만찬의 중요성을 역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는 모든 죄에서 구속하셨을 뿐 아니라, 죄를 이기는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빵과 포도주로 힘을 얻듯이, 우리의 영혼도 주님의 몸과 피로 새힘을 얻습니다. 성찬은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음식입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줄 뿐 아니라, 우리를 성화의 단계에 이르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죄에서 자유코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또한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는 주님의 초청에 성실히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식탁을 등지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자주 이를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Do this OFTEN in rememb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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